" 내 사랑. 나를 기억해줘. 네 손끝, 네 귓가에 남은 나를. "
- 블라인드 中
처음 이 영화를 언제, 어떻게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겨울에 이 영화가 떠올랐고, 그때마다 전 루벤이기도 마리이기도 빅터 선생이기도 했습니다.
눈이 멀어 마음을 닫은 남자와 사람들의 눈으로 마음을 닫은 여자의 사랑 이야기. 영화를 보는 내내 나 또한 그들에게 자유롭지 못한 시선을 주는 사람이 아닌가 뜨끔했습니다. 눈이 멀어 마음이 닫힌 루벤은 자기 멋대로 폭력적으로 행동하지만,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는 마리에게 점점 마음을 열게 됩니다. 루벤이 원했던 건 자신이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는 걸 알아차리고 꺼내 주길 원했던 걸까요? 아니면 장님이라고 불쌍한 취급을 하지 않는 마리에게 고마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마리가 읽어주는 책으로 세상에 손을 내밀고, 그런 세상에 마리는 루벤 혼자 사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 줍니다. 그녀는 루벤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로 자신의 외모에 대해 거짓말하지만, 루벤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자신에게 대했던 태도, 감정들로 그녀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확신하죠.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뚜렷한 이목구비, 백옥 같은 피부, 앵두 같은 입술, 우리는 겉모습의 아름다움으로 많은 것을 평가합니다. 그 겉모습을 벗어나 보면 아름다움으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생각이 올바른 사람, 무언가에 열정적인 사람, 조용히 누군가를 도우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 찬찬히 뜯어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리는 책을 사랑했고, 루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느끼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생각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을 보게끔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녀는 루벤의 시선이 너무나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을 아름답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에게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먼저 도망간 것이리라.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도서관에서 시력이 돌아온 루벤을 본 마리는 도망가려다 발걸음을 돌려 그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니 조금 슬퍼졌습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눈을 루벤에게서 보고 싶었던 것이었죠. 하지만 루벤은 마리를 처음 봤을 때 놀랬고, 그 당황스러워했던 행동들이 그녀에게는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은 느낌이었으리라. 루벤은 마리의 향기를 알아채고 그녀에게 책을 읽어봐 달라 부탁하며 마리임을 알게 되지만, 그녀는 루벤에게서 자신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다고 그에게서 도망칩니다. 루벤은 마리가 자신을 떠난 게 보이는 것 때문이라는 좌절감으로 눈을 찔러 다시 장님이 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루벤은 자신의 눈을 찔러서만큼 눈이 보이는 세상에 환멸을 느꼈던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 그 아름다운 것들을 봐도, 마리가 보여준 손끝과 목소리의 세상의 반만큼도 따라오지 못한 것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을까요. 루벤에게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보인다는 것'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달아나버린 가슴 아픈 산물이었음을 알게 된 그의 마음이 짙은 여운처럼 가슴에 남습니다.
저는 과연 그녀를 아름답다고 평가할 자격이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상처 받은 인간에게 세상은 너무나 가혹한 잣대로 평가했습니다. 마리는 루벤에게 세상을 보여줬지만, 루벤은 마리가 세상에서 다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존재였겠지요. 루벤은 다시 손끝으로 세상을 보는 일상으로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돌아갔습니다. 쓸쓸하고 아름다운 영화 "블라인드"로 나의 눈, 시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의 시선이 폭력이 될 수도, 좋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편견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영화는 잔잔한 동화책을 읽은 것 같았지만, 책을 덮을 즈음엔 가슴 깊이 슬픔이 밀려오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서 쓸쓸하고 담담했던 루벤의 미소는 무슨 의미였을까요? 저에게 보이지 않은 맞은편에는 마리가 있기를... 그들의 사랑이, 마리의 세상에 대한 냉혹한 편견이 비극적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영화를 본 후,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라는 문장이요.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말해준 동화 "어린 왕자"와 겉모습의 아름다움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고 말해준 영화 "블라인드"는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보는 것'에 대한 제 편견을 돌아보고, 세상을 보는 다양한 방법을 곱씹어 보았죠. 눈을 천천히 감고, 손 끝의 감촉과 귀로 들리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들로 세상을 한 번 보고 느껴 보아야겠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수도 있으니깐요.
내 영화 별점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