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다. "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中
전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합니다. 들고 다니기도 무겁고 셔터와 조리개를 조절하는 건 아직도 어렵지만, 뷰파인더로 본 그 순간을 찍으면 마음속에도 함께 남겨진 기분입니다. 휴대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찍을 수 있지만, 필름 카메라로 찍은 찰나는 그때의 제가 어떤 감정으로 찍었는지 그 찰나의 순간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라이프(Life) 사진들을 보면, 그 순간을 찍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라이프(Life) 사진전은 한국에서도 여러 번 열렸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2017년 서울 예술의 전당과 2018년 부산시민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라이프 사진전을 보러 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체 게바라, 마릴린 먼로 등 20세기 유명인들의 모습이나, 전쟁의 참혹하고 두려운 순간,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행복한 장면 등 다양한 사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두려움을 느꼈고, 다른 곳에서는 행복함을 보기도 했었습니다. 영상이 주는 매력적인 역할에 밀려나긴 했지만, 0.1초의 순간을 담은 사진은 강력한 이야기를 담고 있죠.
라이프(Life)는 1936년 <타임>의 발행인 헨리 루스가 창간한 미국의 시사 화보 잡지입니다. 사진 중심의 획기적인 편집으로 저널리즘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고, 국내외 정치와 전쟁,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적인 사진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텔레비전 등 영상매체의 발달로 인해 쇠퇴를 거듭하다가 2007년, 71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폐간되었고 현재는 웹사이트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은 출판 잡지에서 온라인 매체로 전환하는 과도기에서 주인공 월터 미티가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6년째 ‘라이프’ 잡지사에서 원화 사진 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월터 미티는 해본 것도, 가본 곳도, 특별한 일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입니다. 그런 월터에게는 남보다 좀 더 과한 상상을 하는 시간이 있는데, 갑자기 멍 때리는 시간을 가지면서 현실에서 도피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영 악화로 '라이프'지가 다른 회사로 팔리면서 폐간 전 마지막 호를 발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알게 된 사진작가 숀 오코넬이 그동안의 감사의 선물로 그에게 필름 원본과 지갑을 줍니다. '25번째 사진은 꼭 표지로 써 줬으면 하네. 거기에 내 사진작가 인생의 정수(The Quintessence of life)를 담았어.'라는 편지와 함께 필름을 받았지만, 정작 받은 필름에는 25번 사진이 없었습니다.
월터는 사진을 찾지 못할 경우 직장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다른 사진을 분석해 그가 있었던 장소가 그린란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숀을 찾아 25번째 사진을 받기 위해, 그린란드로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술에 취한 헬기 조종사가 운전하는 헬기 타기, 헬기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내리기, 상어와 싸우기, 아이슬란드의 길에서 롱보드 타기, 폭발 직전 화산을 피해 도망치기 등 월터는 지금까지 살면서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모험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25번째 사진을 당장 갖고 오라는 연락을 받고, 숀을 만나지 못한 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갑니다. 영화를 보면서 깨달은 건 월터가 모험을 할수록 상상하는 순간들이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는데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상상 밖에 없었던 그가 더 이상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이 없다고 얘기한 월터에게 구조조정 책임자는 그를 해고했고, 실망감과 허탈함으로 숀이 준 지갑을 버립니다. 월터는 밝히지 못한 마지막 사진을 보다가 그 사진이 어머니의 피아노임을 알게 되고, 숀이 일주일 전쯤 월터의 어머니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듣습니다. 그리고 월터가 아프가니스탄의 눈표범을 찍으러 갔다는 걸 알고,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모험을 떠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히말라야에 올라 숀을 만나게 되지만, 25번째 사진은 숀이 선물로 준 지갑 속에 있었다는 말에 월터는 허탈감을 느끼게 되죠. 그리고 숀이 찍고자 하는 눈표범이 나타나지만, 뷰파인더를 통해 월터에게 눈표범을 보여주곤 사진을 찍지 않고 가만히 감상을 합니다. 월터가 '언제 찍을 거냐'라고 묻자 '그냥 이 순간에 머물고 싶어서' 찍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숀은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터는 그가 버린 25번째 사진이 무엇인지 숀에게 묻지만 '유령 표범처럼 아름다운 것.'이라는 아리송한 대답을 하고는 축구를 하는 셰르파들에게 갑니다.
월터는 모험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그가 버린 지갑을 어머니가 다시 줍니다. 25번째 사진을 찾은 월터는 '라이프' 본사로 가서 구조조정 책임자에게 차분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인 것 알겠지만, 라이프 모토를 믿고 일을 한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한 건 잘못했다고 다음 직장에서는 그러지 말라고요. 그리고 25번째 사진을 건네줍니다. 월터는 같은 부서 후배와 짐을 싸서 나가며 25번째 사진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후배에게 일부러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퇴직금을 받으러 온 날, 우연히 만난 셰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두 사람이 길을 걷다 가판대에 25번째 사진이 표지에 장식된 '라이프'지 폐간호를 보게 됩니다. '모든 직원에게 바칩니다.'라는 글과 함께 표지에는 필름을 검사하고 있던 월터 미티의 사진이 찍혀 있었습니다. 16년간 함께 일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월터의 모습에 '라이프'의 정수가 담겨 있다는 말로, 자신의 사진에 담긴 정서를 최대한으로 살려 준 월터에 대한 숀의 경애와 애정을 느낄 수 있었죠. 월터는 숀의 사진에 큰 감동을 받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에서 좋았던 장면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름다운 풍광을 가르며 아이슬란드의 긴 내리막을 롱보드로 내려가는 월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장면은 어릴 적 모히칸 머리로 스케이트를 타며 대회를 휩쓸 정도로 활발했던 그였지만, 아버지의 부재 이후 현실에 치여 살아왔던 월터가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조금은 자유로워졌다고 느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25번째 사진을 갖다 주며 구조조정 책임자에게 차분하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는 월터의 모습이었습니다. 영화 초반에는 구조조정 책임자가 조롱해도 아무 말도 못 했던 그였지만, 영화 후반부에 라이프의 모토를 믿고 헌신해온 직원들을 대표해 월터가 했던 말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보였습니다. 이 두 장면은 월터 내면의 성장이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해서 기억에 남아요.
영화는 남들이 해보지 않은 멋진 모험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일 수도 있는 현재가 중요하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죠. '라이프'지의 마지막 호에 담긴 월터의 모습에서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을 담아내려고 했던 영화의 주제가 드러났습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엑스트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SNS 속 세상을 볼 때나,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일상을 볼 때 내 일상은 보잘것없이 느껴지기도 했죠. 하지만 영화가 그런 나의 일상도 소중하고 멋있다고 말해줘서 고마웠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라이프'라는 것을요.
내 영화 별점은?
★★★★★